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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Contribution)

연보 (Contribution)

연보(CONTRIBUTION)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요,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요, 떡을 떼는 일이요, 교제하는 일이며, 기도에 전혀 힘쓰는 일입니다. 이 예배의 순서가 초대 교회 때 사도들이 행했던 예배였습니다(사도행 전 2장 42-47). 예배의 내용 중 연보는 몸과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요, 물질까지도 드리는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할 때 우 리 마음에 기쁨이 없이 부담으로 행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연 보는 전도자의 설교 값이나 교회의 입장료라고 생각한 것인지 너무 뜻이 없고 아 무 즐거움도 없이 그저 던저 주는 것으로, 자기 앞에 오는 순서에 억지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우리가 알지 못해서 하나님 앞에 잘못을 행하 고 있으면서도 잘못인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국 무 교주의를 주장하는 한 지도자는 그의 저서에서 하나님께 바친다는 헌금은 허울을 벗기고 교역자 생활비라고 해서 걷어야 한다고 주장하 였습니다. 과연 헌금이 교역자의 생활비를 위해 걷는 다는 정도로 단순한 모금 일까요? 그 성서적 진단을 해보겠습니다.

 

1. 연보란(WHAT IS THE CONTRIBUTION ?)

 

연보라는 단어는 바울이 그의 서신 고린도 후서 8:20, 9:11, 고린도 전서 16장1에서 사용하였고, 또 같은 내용의 뜻이지만

성도를 섬기는 일(롬15:25,고후 9장1),

가난자한 자를 위한 동정(롬15:26),

서로 나누어 주기(히브리서 13:16)

구제(마태복음 6장2)

서로교제(사도행전2장42)

등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한글 성경상 연보로 나와 있는 것도 그 원어를 찾아보면 각각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가) 고린도후서 8장 20절 : 연보는 하드로테스(Hadrotes)란 단여가쓰였으며 이뜻은 풍부(abundance)이고

     나) 고린도후서 8장 2절 : 연보는 하프로테스(Haplotes)란 단어로 너그러움(Liberality)이고

     다) 고린도후서 9장 5절 : 연보는 유로지아(Eulogia)는 단어는 축복 (Blessing)이며

     라) 고린도전서 16장1절 : 연보는 로게이아(Logeia) 라는 단어는 모금 (Collection)으로 나와 있습니다.

반면에 같은 뜻인 희랍어 코이노니아(koinonia)란 한 단어가 한글 성경상에 여러 가지의 표현으로 나와 있습니다.

 

1) 코이노니아 의 표현(Meaning of Koinonia)

 

      가) 교제(행2:42, 고후6:14, 갈 2:9)

      나) 참예(King James Version 에는 fellowship and communion으로 나와 있습니다.(고전 10:16)

      다) 서로나누어 줌(히13:16)

      라) 동정(contribution -롬15:2-6)

이와 같이 위에 사용된 코이노니아는 크게 나누어

 

(1) 인간과 인간과의 교제인 물질적교제(행2:42, 롬15:26, 히13:16)

(2) 인간과 하나님과의 교제인 영적인교제(고전10:16,1:9,요일1:3,6)

으로 사용되었음을 봅니다.

이렇게 볼 때 참다운 코이노니아는 물질을 서로 나누어 주며 사랑을 나누는 형제간의 교제를 말하며 역시 하나님께 우리의 몸과 마음을 바치어 하나님 과 교제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참다운 연보는 우리가 가진 전부를 바쳐야 합니다. 물질만이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마음도 바쳐야 합니다.

이 코이노니아의 수평적인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와 수직적인 하나님과 사람 과의 관계를 살펴봅시다.

 

(1) 형제간의 교제(헌금)

우리 인간들은 누구나 하나님을 잘 믿기 원하고 하나님을 잘 공경하 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 인지 그저 공경한다고 합니다. 대개가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할경우가 있습니 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나와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물었을 때, 계명을 지키 도록 하고 마지막으로 네 소유를 팔아 간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 에서 보화가 네게 있다고 하였지만 그 청년은 재산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가 버렸습니다.(마16:16-21) 분명히 방법을 제시하여 주었지만 포기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재산을 모으기에 전력을 기울립니다. 또 모아둔 재산에 도적 의 침입과 화제의 염려로 밤잠을 깊이 못잡니다. 왜냐하면 모든 수고가 하 루 아침에 허사가 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그래서 은행에 맡깁니다. 은행이 야 안전성이 어느정도는 있기는 하지만 천만금이 있어도 죽음후에는 역시 허사가 아닌가요?(마16:26)

주님은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에 저금하라 하십니다. 그곳에는 도적 도 가까이 하지 못한다 했습니다. 그것은 천국에 저금하는 것입니다.(눅12:33)

예수님은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 이라도 주는 자는 결코 상을 잃지 않는다(마10:42)고 하였으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내게 행한 것이다(마25:40)고 하셨습니다. 역시 주님은 형제가 병들었 을 때 돌아보고 헐벗었을 때 입히 우고 목마를 때 마시 우게 했던 사람더러 너는 내가 목말랐을 때 마시 우게 했다고 하시지 않았는가요?(마25:35-36)

이것이 바로 천국 저금이요, 하나님을 섬기는 길입니다. 우리가 가지 고 있는 재물은 형제를 사귀는 매개체입니다. 가지고 있는 재물을 충분히 활 용하여 그리스도가 가르친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눅16:9)는 교훈에 따라서 천국에 더 많은 저금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은 교회 연보 궤에 넣어 교회를 통해 가난한 자를 구제하거나(롬15:25,26 고후9:1) 또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준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개인적으로 자선을 베풀거나(눅10:25-37), 바울이 그의 동역자들의 쓸 것을 도운것과 같이(행 20:24) 복음 사업을 위해 개인적으로 후원함으로 천국에 저금할 수 있는 것 입니다.

연보는 사랑의 실증입니다.(고후 8:8,9)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후 8:1-7, 고전16:2)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사랑을 생각해서 우리도 내 이 웃을 사랑한다는 증거가 곧 이 연보입니다. 빈부를 막론하고 할수 있습니다. 간난한 자는 연보의 대열에서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과부는 자기의 전재산인 두 렙돈을 연보 궤에 넣어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며 환난과 시련과 극한 상황 속에서도 기쁨으로 풍성한 연보를 한 마케도냐 교회들은 바울로 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고후8:1,2)

 

(2) 하나님과의 교제(헌신)

요사이 교계에는 헌신이란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헌신이 하나님 앞에 몸과 마음을 함께 바친다고 간주될 때, 이것이 하나님과의 교제라 할 수 있습니다. 물질을 하나님 앞으로 드리기 전에 자신을 먼저 드려 헌신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몸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모범을 보이셨으며(고후 8:9), 마케도냐 교회는 이를 실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고후8:5) 이것이 바로 연보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주인이요 우리는 청지기

(God is our master, we are God's servant)

 

우리 인간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에 대해 절대주의적인 것 같이 착각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도적이 왔다 간 후나 재산을 잃은 후, 또 는 인색한 부자의 죽음을 보았을 때, 그 착각에서 깨어나기도 합니다. 물론 욥은 모태에서 적신으로 나왔은 즉 또한 적신이 그대로 돌아가올찌라(욥12:9) 고 일찍이 이 진리를 깨달았고, 전도서의 저자도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됨을 깨닫고 그 주인에게로 돌아가기를 권고 하였습니다(전6:10)

인간이 가난하고 어려울때는 돈만 있으면 교회에 많이 바치고 싶고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마음껏 도와주겠노라고 생각을 하지만 부자가 되고보 년 이것을 다 잊고 심지어는 하나님까지 잊어 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은 포도원을 세를 주고 주인이 타국에 가서 실과 때에 실과를 받으려고 그 종들과 아들을 보냈으니 오히려 때리고 죽인 비유를 보여 주셨습니다. 세든 농부와 같이 욕심을 부려 그 주인을 모르고 실과 때 실과를 주 지 않기 위해 종들과 상속자를 때리고 죽인 것 같이 우리의 재산에 대한 애착심 때문에 우리 자신의 주인을 망각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 주인을 사랑 해야 할 텐데 주인 아닌 물질을 사랑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 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6:10)라고 하였습니 다. 성경에 보면 돈에 애착심을 가지고 돈을 사랑하다 죽은 사람들이 있습니 다. 아간은 바친 물건을 훔쳐 장막에 감주어두다 죽었으며(여호수아7:1) 은 30에 예수를 판 유다, 또 땅 판 값을 감추어 두고 사도를 속인 아나니아 부부 등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사랑하고 섬길 수 없습니다.(눅 16:13) 우리는 아무리 물질을 사랑하여도 영원히 소유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의 주인 되심과 인간의 청지기 됨을 생각해 봅시다.

 

(1)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God is our Master)

     가) 하늘과 땅 그리고 거기에 가득한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창14:19,20, 시24:1, 레 17:30)

     나) 모든 동물이나 짐승이 그의 것이고(시 50:10-12)

     다) 금과 은이 그에게 속하며(학개 2:8)

     라) 모든 영이 그에게 속합니다.(에스겔18:4)

세상의 물질만 주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과 몸까지 주 의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피로 산 것입니다.(고? 6:19,20) 그래 서 바울은 죽어도 주를 위해 죽고 살아도 주를 위해 산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2) 우리는 청지기 입니다.(We are Servant)

 

     가) 예수님은 딸란트 비유와(마25:14-30) 부정한 청지기(눅16:1-9)에서 인간의 청지기 됨을 가르치셨습니다.

     나) 바울은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인식했습니다.(고전 4:1-2, 9:16-17)

우리의 헌신과 헌금은 청지기 신분으로서 방출이나 사역에 불과합니다. 교회에 헌금을 할 때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기증한다는 관념을 갖기 쉬우나 물건 자체가 하나님의 것인데 어떻게 우리가 주인에게 기증을 할 수 있으며 또 하나님께서 인간의 기증을 받도록 가난하지는 않습니다. 오 직 청지기로서 자기가 맡고 있는 재정과 사업에서 내어 놓는 것에 불과 합니다. 어떤 청지기는 지혜 있게 처리하고 칭찬을 받고(눅16:1-12), 어떤 청지기 는 자기가 맡은 재물을 잘못 처리한 어리석은 청지기도 있습니다.(눅16:19-21) 


3. 그리스도인의 연보는 언제, 어떻게하는가? 

    (HOW CAN WE CONTRIBUTE, WHEN?)

 

1) 언제 연보를 하는가? (WHEN?)

헌금을 언제 하느냐고 물으며 누구나 예베 시에 한다고 할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들에게 연보에 대하여 매주의 첫날 함께 모일 때에 모아두어 자 기가 갈 때 갑자기 하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고정16:1) 온 회 중이 매 주 첫날에 모이기 때문에 모일 때까지 모아 두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연보 하는 날이 그날 하루에 국한 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많은 연보 방법 중 하 나에 불과 합니다. 우리는 매주일 내내 얼마든지 연보나 헌신할 수 있습니다. 선한 일이라면 시간의 제한 없이 언제나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너희가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기회 있는 대로 하여 야 합니다. 연보가 연보바구니에 넣는 것으로 그친다면 일주일에 한번이겠지 만, 그리스도인의 연보는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2) 어떻게 연보를 하는가?(HOW CAN WE CONTRIBUTE?)

가) 각자가 . .

기독교는 하나님과 각 그리스도인 개인과의 관계입니다. 그 리스도인은 각자가 완수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연보는 각자가 개 인적으로 하여야지 가족적으로나 집단적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너희 각자가 이익을 얻은 대로(고전 16:1,2)라 했으며,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 나님께 직고하리라고 했습니다.(롬14:12) 선행은 남을 대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을 행한 자는 자기의 선으로 삼고, 악을 행한 자는 자기의 악으로 죽습니다.(에스겔18:1-4)

 

나) 자발적으로. .

연보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명령도 아닙니다(고후 8:8) 스스로 자원하여(고후8:3), 또 준비하여 두었다가(고후9:5, 고전 16:2)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드린 연보에 대해서는 조금도 인색함이 없이 기쁨에 서 우러나오는 것이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내는 자에게 은혜를 충 성히 내리십니다.(고후9:6-11) 마케도냐 교회들도 극한 환난과 시련 중에서도 풍성히 연보 하였으며,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낼 수 있었습니다(고후8:1-3)

이와 같이 희생과 사랑을 가진 연보가 참 연보라고 하겠습니다. 인 간은 어떤 때 일시적인 감정으로 연보하고 곧 후회하기 쉬우나 후회함이 없이 드려야 합니다(고후8:12)

 

다) 은밀하게..

주님은 은밀한 구제를 가르치셨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도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어떤 선행이든지 해놓고 인간으로 부터 칭찬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영광을 얻기 위 함입니다. 청지기로서라면 아무리 많은 금액의 연보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 다. 마땅히 바칠 것을 주인에게 바치지 않았는가요? 그러나 일반 교회들의 교회의 재정을 늘리기 위해 교회앞에 헌금자와 헌금액수를 발표하는 일은 너무나도 세속화된 것입니다. 우리는 연보와 일반 사회의 모금과는 구별하여 야 할줄 압니다.

 

다) 얼마를 바쳐야 할까요?

교인들의 머리 속에는 연보의 최고 최선의 양이 십일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바치니 믿음이 있다고 칭찬을 받기도 하고 또 자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구약에서 언급되었습니다. 신약에서는 십일조 가지고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오늘날 각 교회에서 십일조에 대하여 강조하는 것은 신약 시대인 오늘날에도 십일조만큼도 내지 않기 때문에 그것 을 내게 하기 위해서 구약의 법까지 총동원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의 연보는 양이 정해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보면 바울을 통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자신을 먼저 주께 드리고(고후 8:5) 마음에 정한대로 연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피값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는데

우리 자신을 먼저 산 제사로 주께 드리고(롬 12:1,2) 다음은 물질을 드리는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연보는 가진 것 전부인 두 렙돈을 연보 궤에 드렸습니다. 마케도냐교회는 심한 환난 속에서도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연보를 하였습니다. (고후8:1-3) 힘에 지내 도록이란 십일조가 아니고 과부가 드린 연보는 십일조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이었습니다. 물론 인간이 아무리 많은 연보를 한다해 도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보답할 수는 없습니다.(고후 8:9, 9:15) 그러나 많 이 심은 자가 많이 거두고 이것은 스스로의 영을 살찌게 하는 일입니다.(고후 9:6-7)

 

     가난한자와 부자가 능력대로(고후 8:12-15)

     이익을 얻은 대로(고전 16:2)

비율적으로 내는 것입니다. 무조건 어떤 똑같은 액수를 계속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 연보의 액수에 대해서도 비교해서는 아니됩니다. 오직 자기 마음에 정한대로 또 자기 형편과 신앙에 따라 바치면 됩니 다. 청지기는 정확해야 합니다. 언젠가는 주인이 계산하기 위해 부를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형편에 따라서란 그렇다고 주일 예배에 참석한 그 당시 호주 머지 사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자는 6일 동안 다 허비해버리고 빈 호주머니로 교회에 출석할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기간동안 얻은 이익과 번영에 따라 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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