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C 설립자는 누구 입니까?
설립자에 대한 논란이나 문제는 애초에 존재했던 것이 아니고 지금도 그러하다. 다만 설립자를 자신들의 입지와 상황에 따라 논란을 일으킨 것뿐이다.
KCC 해외동문회가1998년 10월 선교사들에게 물은 질문이다. 해외동문들 중 모교의 설립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이 질문을 스승인 선교사들에게 물은 이유가 있었다. 당시 김진건 전 총장은 그리스도 신학대학교란 이름이 목사 훈련소 같다면서 “강서대학교”로 개명해야 한다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강행하였다. 그러나 동문과 교수들, 교계, 심지어 KCEF (주: 이 때까지만 해도 최수열 설립자가 생존해 있어서 인지 김진건이 오토크리-KCEF가 설립재단이라고 공공연히 말 못하고, 후원재단이라고만 함 ) 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김진건은 해임 되고 김씨의 호위무사였던 몇 교수들까지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이 설문지에서 빌램지, 알랜, 배어득, 파수리 선교사 모두는 최수열이 설립자라고 답했다. (주: 최수열이 KCC 설립자라는 구체적인 문서들은 최수열 최초의 후원 교회인 워싱톤 교회 뉴스레터에 나와 있다.)
이철선은 기억력이 없어서 분명한 답을 못하겠으니, 조사한 결과를 알려달라고 하였다. 단 한 사람 하등만 홀튼, 최수열, 동충모가 설립자라고 추측한다 (guess) 고 답을 하였다.
이 설문조사를 하기 4개월 전 해외동문회는 은사와의 모임 이라는 주제 하에 최수열, 빌램지, 이철설 선교사 부부들과 네쉬빌 테네시 한 호텔에서 모임을 가졌었다. 이 때 참석자 모두는 최수열이 설립자라는 것을 기정사실로 정하고 KCC초창기 때 얘기를 주로 했었다. 여기에 참석한 동문들은 60년대 초부터 최수열을 잘 알았고 같이 일한 사람들이어서 모두가 식구 같은 만남 같았다. 이 때 필자는 켐코더로 이 때의 대화를 녹화하였고, 빌램지 선교사도 자신의 녹음기로 녹음하였기에 그 때의 생생한 역사적 기록을 아직 보관하고 있다. 이때 이철선은 홀튼이 온 연대까지 기억할 정도로 기억력이 좋았다.
최수열의 증언
조준제 동문: 1954년 한국에 오실 때 식구랑 같이 오셨는가?
최수열: 그렇다. 당시 아이들 넷이 있었는데, 제일 나이 많은 제테타가 12살, 제일 어린 랜디가 1살이었다. 홀튼이 당시 나이가 많아서 (GA, Gospel Advocate 1960. 12.22) 워싱톤 교회는 그가 계속 남아 있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를 내보내기 원했다. 내가 그래서 여비만 주면 그를 한국에 데리고 가겠다고 했더니, 여비를 줘서 한국에 와서 나를 도운 것이다. (홀튼은 노약하여 사실상 최수열과 같은 선교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의 역할은 성경공부하고, 조언하고 보고하는 일을 했다. Christian Chronicle)
빌램지: 홀튼이 KCC를 시작하라고 했는가
최수열: 아니다. 사실 홀튼은 대학 설립을 반대했다. 홀튼은 말 수가 적었지만, 부인은 대학 반대주의에 빠져 있어서 있었다. 여기에 대해 나는 그녀와 많은 충돌을 했다. 당시 David Lipscomb이나 ACC 등 여러 대학들이 대학 발전과 박사 학위제를 도입하는데 분쟁이 있었던 때였다. (주: 미국에는 주일학교까지도 비성서적이라고 해서 반대하는 교회도 있는 것을 봐서 홀튼 주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KCC는 샬롯, 볼티, 유나 교회가 각각 $5,000씩 은행에서 돈을 빌려 줘서 내가 대학부지를 사고 KCC를세웠다. Korea Christian College란 이름은 내가 지었다. 처음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오도록 Universal Christian College로 하려 했다.
박병수 동문이 재차 물었다: KCC 초기에 홀튼이 KCC를 위해 어떤 활동을 했나?
최수열: 글쎄 (Well, yeah,) 두 분은 내가 초청을 했다. 당시 그는 은퇴하려던 참이었다. 나이가 많고 해서 좀 고생을 하고 있었다.
이철선 부인 페기: 홀튼 형제는 많이 쉬곤 했다. 설교를 한 그 날은 피곤해서 쉬어야 했다.
최수열: 그는 설교를 잘했다. 내가 그를 초청했다. 그와 같이 일한 것을 감사한다. 내 나이 82세인데 참 멋진 인생 경험을 했다. 그 이야기들이 전해질 필요가 있다.
최수열은 그런 사람이다 ( Haskell Cheshire is such a man!)?
이 말은 1964년 7월 Korean Reporter (월간 소식지, 앞으로 KR로 표기)에 하등 선교사가 최수열을 가리켜 한 말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동기만 부여하면 돈은 나온다.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아마도 가장 어려운 일이면서, 사랑의 수고에 대한 고마움을 받지 못하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을 포용하기에 충분한 사랑을 가진 자만이 엄청난 책임을 맡게 된다.
바로 그런 사람이 최수열이다. 그는 지난 몇 해 동안 한국 선교사업을 위해 미 전역을 누비며 모금을 했다. 1963년 3월 그가 극심한 피로와 어지러움 때문에 로스 엔젤스에 있는 사위 아파트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는 모금을 위해 무자비하게 자신을 혹사하여 녹초가 되어 목소리까지 잃었다. 그는 밤낮을 쉬지 않고 강행군을 했다. 결국 병이 들어 병원으로 가던지 무덤으로 향하든지 할 지경까지 되었다. 아직도 학교와 효창동 선교단지에 남은 빚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한국의 3천만 민족을 위해 그의 메시지에 마음 문을 열기 바란다. 그는 선지자였다.
최수열은 세계를 금세기 안에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는 비전을 가진 프로모터 였다. 한국의 모든 선교 프로그램은 그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의 결과이다. 홀튼과 그 외 선교사들은 그의 강권에 의해 한국에 나오게 되었다. (홀튼은 한국에 나와 대학을 세우고 선교할 계획이 애초에 없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받은 도움은 그의 공으로 돌려야 한다. – 하등 부부, Korean Reporter 1964년 1월.
최수열 행전
The Korean Reporter라는 월간 소식지가 있다. 이 소식지는 1961?부터 1964년 말까지 최수열이 주로 집필하고 오토크릭 교회가 발행하였다. 그 이후에는 1980년대까지 최수열을 포함 여러 선교사들과 장로들이 번갈아 편집하고 여러 후원 교회들이 연합하여 발행한 소식지이다. (주: 이것은 처음부터 최수열이 집필한 1차 자료로서 역사적으로 귀중한 문서다. 이 자료보다 선교현장을 더 자세히 기록한 문서는 없다. 이 자료는 본인이 수집하여 KCU 역사연구소에 이미 기증하였고 여러 해 전부터 필요한 형제들과 공유했음에도 활용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그 외에 테네시 소재 센터빌 교회가 발호행한 최수열의 소식지 the Korean Story가 있다. 센터빌 교회는 최수열의 후원 교회로서 당시 동석기 전도자 기념 도서관 건물을 지을 때 앞장선 교회였다. 이 때 건축 예산은 어림 $500,000로 책정되었는데, 최수열은 선봉에서 모금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 1972년 10월 1일, 1호.
또 하나는 Korea Calls라는 1963 경 켈리포니아 소재 켐벨 교회가 발행하고, 목장에 관계된 형제들이 주로 집필한 소식지가 있다.
나는 이 모든 간행물을 통틀어 최수열 행전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최수열이 KCC를 설립하러 올 때부터 그가 아니었으면 존재가 불가능한 기록들과 내용이 최수열은 그런 사람이라는 행전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에 와서 사도행전을 가르쳤고, 초대 교회의 사도들처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평생 실천한 사람이다.
최수열 의 핵심 신앙은 “있는 자들이 없는 자들과 어떻게 공유할 것인가” 이다.
이것은 1965년 4월 오토크릭 교회에서 열린 워크샵 주제 중 하나였다. (주: How can the brain power, talent and resources of Christians in American be better focused on evangelizing the Orient?) 만일 KCC와 한국 교회가 지속적으로 이런 관계를 유지해 왔다면 지금의 결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믿는다.
최수열 설립자와 후원 교회들
선교사와 후원교회들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스폰서 교회는 모금을 하고 선교사들은 선교하고, 가르치고 연구하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KR 1964. 4. 그러나 최수열 선교사가 자기는 원래 하고자 하던 일을 못하고 있다 고 말을 한 적이 있다. 교파 교회에서는 선교사를 파송하면 모든 경제적 지원을 해 주기 때문에 맡은 일에 충성할 수 있다 고 그들을 부러운 것처럼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GA 문서) 이 말을 다른 말로 말하면 그는 파송을 받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는 자신이 피선교지인 한국을 택했고, 자신이 전국을 누비면서 모금을 한 사람이다. 그 모금한 헌금을 자기가 선택한 교회에 보내는 곳이 후원 교회인 것이다. BCC의 빌램지, 선교회의 파수리 선교사가 그 경우다.
초창기 최수열이 모금해서 한국에 보내온 달러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특히 볼티 교회는 매달 500백불, 히코리 교회는 400 불을 보냈다. 당시 후원 교회 약 50여 교회가 되고 개인까지 합쳐 매달 3000-4000불가량 한국에 송금을 했다. 물론 대지, 학교 건물, 선교사 사택은 별도였다. 당시 달러는 피와 같이 귀한 것으로 국가적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GA 1961. 3. 16) 그는 한국 경제에도 유공자 였다.
최수열이 이흥식 전도자가 한 말에 충격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는 성경책이 아니고 먹을 것이 필요하다” 그는 대학도 세우고, 교회도 세우고, 구제도 해야 했다. 때문에 모금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최수열이 도움을 요청했을 때 그들은 No라고 말할 수 없었다. (주: 1961년 3월 16, Gospel Advocate에 보면 그의 모금 활동이 생생히 기록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