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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하나님을 경외하라(fear to God)

songgang 2013.11.08 17:44 Views : 901 Recommend:37

하나님을 경외하라
신명기 6:4-9
첫째, 경외(敬畏)

[히] ta'r]yI(yir'ah) [그] Fovbo'"(phobos)
[영] Fear Reverence
        하나님의 권위와 거룩하심에 대한 공경과 두려움을 나타내는데 쓰는 용어, 일반적인 대인관계 및 위협적인 자연 현상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있는데, 성서에서는 특히 후자에 대해, [여호와를 경외하며](수 24:14),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시 19:9), [여호와를경외하는 것](잠 1:7)등과 같은 표현이 아주 많이 씌어져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일은 신앙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고, 자기 죄로 인하여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두려워하는 일은 지당한 일이다. 두려움은 성경에서 아담의 불순종과 관련하여 맨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죄를 지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심을 알게 되고 그에 대한 심판을 두려워하게 된다(창3:10). 두려움 그 자체가 또한 죄에 대한 하나의 형벌이다(레26:17; 신28:25, 66). 이기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두려움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데 적당치 않다(수2:11). 그리고 이러한 두려움도 금방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신20:8). 달란트 받은 자들의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자는 두려움을 가졌기 때문에 그 한 달란트를 사용하지 못했다(마25:25). 두려워하는 자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계21:8).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반복해서 강조되어 있다(수1:7, 9; 렘1:8; 겔2:6). 두려움은 믿음으로써 극복되어진다(사46:2; 112:7).
두려움이란 용어가 가장 특징적으로 사용된 경우는 그것이 하나님과 관련된 경우인데, 이러한 두려움은 경외(敬畏)로 표현된다. 사실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경외하는 것)은 구약성경에 있어서 참된 신앙에 대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지헤의 근본(시작)이며(시111:10), 정직함의 열쇠(비밀)이고(잠8:13),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며(겔12:13),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 대한 특징이다(시147:11).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성령께서 이새의 가지에게 주신 선물(은사)이기도 하다(사11:2, 3). 물론 종의 영(혹은, 두려워하는영)과 양자(養子)의 영이 대조되어 있기도 하지만, 신약성경에도 하나님을 두려워함(경외함)이 나타나 있다. 성령님의 위로를 따라서 살아나가는 그리스도인들도 두려움에 지배되기도 한다(행9:21).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말미암아 정직하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며(골3:2), 거룩한 생활을 추구해 갈 수도 있다(고후7:1). 그러나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하신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앎으로써 그를 경외하고 경배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에 대해서 마땅히 두려워해야 하는 것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죄인을 궁극적으로 벌하여 지옥에 던질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경고하셨다(눅12:4, 5). 바울도 권고하기를, 두려움을 가지고 악을 피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여 구원을 이루며,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였다. (빌2:12; 엡6:5, 6)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명하는 말씀은, 하나님은 경외할 것을 함께하고 있다(신 6:4-). 시내 산에서 율법이 주어지는 때, 하나님은 영광과 광채 가운데 친히나타나, 이 경외심을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속에 심어주셨다(신 4:10).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응답이다. 어느 정도 하나님을 알고 있는 자만이, 이 경외심(감)을 경험할 수가 있다.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 어리석은 사람(시 14:1, 53:1 잠 1:7)에게는 경외심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경외함의 결과이고(고후 7:1),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 없이 구원은 달성될 수가 없다(빌 2:12).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있어서계시된 사랑의 가르치심(교의)은, 사람들을 저 공포의 노예된 상태에서 해방시키고, 하나님의 아들된 신분을 준다(요 15:15, 롬 8:15, 갈 4:5-8).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 I 요 4:18). 이렇게 하여 인간은 심판의 두려움이나, 하나님이 단지 엄격한 주라는 생각에서 생겨나오는 두려움에서 구원된다(마 25:24, 눅 19:22). 그렇다고, 창조주에 대하여 피조자가 응당 가져야 할 경외심으로서의 두려움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은 아니다. 이 두려움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는, 그 사랑에 매혹되어,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화해해야 할 것을 권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지는 것이다(고후 3:12-).[경외]로 역된 히브리어는 여럿이 보여지는데, 가장 일반적인 것은 명사 [이라- ha}d]yI(yir'ah)](출20:20, 삼하 3:3, 대하 19:9, 느 5:9 기타)로서, 이것과 같은 계통의 말 [모-라-ar:/m(mora')](시76:11, 말 2:5a)는 한가지로 동사 [야-레-arEy:(yare')](창 22:12, 42:18, 출 14:31, 레 19:3 기타)에서파생된 말이다. 신약에서는 [포보스 Fovbo"(phobos)](행 9:31, 엡 5:21)가 명사로서 일반적으로 씌어져 있다.
이스라엘은 40 년의 기나긴 광야 생활을 마치고 바야흐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문턱에 서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받은 율례와 법도의 대략을 다시금 새로운 세대에게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여호와의 명령을 청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율례와 법도는 가나안 복지의 성민이 될 이스라엘에게 기본 전제로써 부과되고 있습니다. "들으라! 이스라엘아"로 시작되고 본문은 일명 '쉐마'(Shema)라 불려지는데 유대인들의 신앙 교육의 대명사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제 본문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성 및 개인과 가정생활의 표준으로서의 성경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성
  쉐마는 초두는 여호와의 유일신 됨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네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나타난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유일한 경배의 대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들 중에 하나로써 존재하는 하나님이 아니며, 다른 신과 공존하는 신도 아닙니다. 그러나 유일신으로써의 여호와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해도 단지 '유일신 사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모슬렘교 등 다른 종교에서도 '유일신 사상'을 갖고 있으며, 하나인 신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모슬렘교도가 '유일신 사상'을 갖고 있다고 해도 그들은 참 신앙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참되신 유일신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그는 구속사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분으로서 애굽에서와, 그리고 갈보리 십자가상에서 우리를 구속하신 오직 한 분이신 것입니다. 이 땅 위의 그 어느 곳에서도 그와 같은 신은 있을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문을 통해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라고 엄히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유일하심, 절대성 앞에서만 철저한 헌신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2.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절대성과 유일성을 선언하신 후, 이제는 전인격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철저히 헌신하지 않는다면, 장차 가나안에 들어가 살 때에 분명코 하나님을 배반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생활 방식을 좇아가는 것이란 시간문제입니다. 우리는 가나안 정착 이후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을 떠났는가를 열왕기서와 역대기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의 우상인 바알과 아스다롯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섬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배도를 미리 아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하여, 즉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후손하게 힘써 가르치라고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3. 신앙의 삶
  1)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먼저 그의 중심이 하나님 말씀에 의해 지배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는 것은 특정한 직분을 받은 자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를 사랑하는 자, 즉 부르심을 입은 신자 모두에게 명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말씀의 전문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2) 개인의 삶을 지배하는 말씀은 곧 가정의 생활을 위한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모세는 이 계명을 각인의 생활 표준으로 제시할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의 가정에서 이 교훈을 철저히 가르치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개인적인 헌신을 요구하실 뿐 아니라 헌신된 개인의 가정 생활 역시 하나님께 드려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부모는 하나님께로부터 가정의 자녀에 대한 교육의 대명을 받은 바 있습니다(참조, 신 11:19 ; 잠 4:1).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6장에서 자녀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참조, 엡 6:4). 자녀 교육에 있어서 부모는 본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부모를 닮기 원하는 자녀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위로, 격려, 불안정의 해소를 위해 직접적인 사랑의 훈계를 해야 합니다. 자녀들의 죄, 위험, 절망적인 결과 등에 대한 경고를 주저하지 말고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라고 합니다.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쳐서 행복의 유일한 길이란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임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리에 앉았을 때, 자리를 옮겨 걸을 때, 그리고 서로 만나 얼굴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달하고 토론하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의 삶 속에서 표현되어져서 그 사람의 미간과 손목의 표지가 되는 동시에 가정 생활에도 중심이 되어짐으로 집의 현관과 바깥문에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8, 9절). 오늘날 가정 교육의 중요성이 더욱 증가되고 있습니다. 사실상 교육에 대한 책임은 학교나 교회, 사회보다도 가정에 있습니다. 가정 이외의 교육 기관들이 아무리 많은 교육적 역할을 수행한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가정'만큼 중요한 교육 기관을 세우신 적이 없습니다. 부모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땅위에서 그의 자녀들을 교육할 의무를 부여받은 것입니다.

둘째, 사랑하라(마22:34-40)
        한 가정이라는 제목으로 2009년도 교회 목표를 삼았습니다. 그 일을 생활화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의 시비에 대하여 설명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부활문제로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던 사두개인들이 돌아가자 이번에는 바리새인들이 계명 문제로 논쟁을 걸어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마음을 익히 알고 계시므로 신명기 6:4,5절과 레위기 19:18절을 통해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1. 가장 큰 계명은 사랑이라고
        1) 사랑에는 다른 계명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대 강령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순종하는 모든 일을 가능케 하는 기초가 됩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바로 성립되지 않는한 어떤 신앙일지라도 그것은 참된 것이 못됩니다.
        2) 사랑 안에서는 영원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계명에는 원천적이고 불변한 특성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신,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사랑 즉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을 가져온 절대적 사랑의 은혜입니다. 인간의 수고로 이루어진 지식, 선행, 권세 등 이 모든 것이 폐하여 질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끝까지 불변하는 힘이 되어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그와 함께 영원히 거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2. 계명도 사랑입니다.
1)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성도가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파생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우리의 삶과 실질적으로 관련된 또 다른 한 인격과의 관계성 속에서 나타나야 할 태도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2) 이웃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동일한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모든 율법들 하나하나가 지향하는 바가 예수께로 나아오게 하려는 데 있듯이 첫째 되는 큰 계명과 둘째 되는 계명은 서로 상충되지 않습니다. 이 둘이 별개의 것으로 나뉘지 않는 한 우리는 한 가지 목적 때문에 이것들을 지켜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이웃을 사랑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앞에서 올바르지 못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도 올바르지 못하며,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사람 앞에서도 결코 올바를 수 없다는 결론입니다.
  3) 이웃 사랑은 또한 동일한 속성을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가 실행해야 할 이웃 사랑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의 속성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대면할 때 거짓으로 관계를 맺을 수 없으며, 그를 최상으로 인정하지 않는 한 관계가 성립될 수 없듯이 우리는 형제를 대할 때 나와 동일한 소중한 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진실하게 대우할 수 있어야 합니다(참조, 요일 4:20, 21).

  3. 이와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룬 것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명령하신 가장 큰 계명인 사랑은 모든 율법의 총체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강조한 바와 같이 '남을 사랑하는 자야말로 율법을 다 이루는 자'( 롬 13:8)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랑을 죄인들에게 친히 확증해 주셨습니다. 이 사건은 갈보리 십자가 위에 달리신 어린양 예수 안에서 이미 천명되었습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사랑의 완성자시며, 온 율법의 성취자이십니다. 이제 우리 앞에 놓인 그의 사랑의 실체가 우리 자신들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재확증되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삶을 포기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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