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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은 누구신가?

songgang 2013.11.19 03:59 Views : 971 Recommend:13



여호와 하나님은 누구신가?


“여호와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신(神)이지?” 하고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수많은 사람에게 신앙의 대상이 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 궁금증의 대상입니다. 여호와는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질문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이에 대한 대답 역시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이제 2,00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 AD 1세기의 상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라고 하는 의사가 있었습니다. 누가는 자신과 친분 관계가 있던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 편지 안에서 누가는 대단히 흥미로운 기록을 남겼는데, 누가가 남긴 그 복음서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또 하나의 두루마리를 편지 형식으로 써서 보냈습니다. 이 편지를 오늘날에는 보통 ‘사도행전’이라고 부릅니다. 사도행전에는 사도 바울이 그리스 아테네를 방문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에서는 그리스를 헬라로, 아테네를 아덴으로 표기합니다.)
아덴에는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대단히 종교적이었습니다. 신전도 많았고, 숭상하는 남녀 신도 다양했습니다. 종교도 제각각이었습니다. 어떤 종교는 그리스 토착신을 믿는 믿음에 기반하고 있었고, 어떤 종교는 다른 나라에서 ‘수입’한 신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옛날, 이렇듯 다양한 종교가 퍼져 있던 아덴에 한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는 아주 진지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주변 세계, 그리고 인류와 자연 그 자체에 대해 생각하던 그 사람은 인간보다 더 위대한 능력을 지니신 분이 존재한다고 느꼈습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느낀 이유는 그 사람을 만들고 그가 살고 있는 이 놀랄만한 세상 전부를 만드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진지한 사람은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그 신을 기쁘게 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이 세상에 둘 이상의 신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가운데 어떤 존재의 마음도 상하게 하지 않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글씨를 새긴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덴 지방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아덴 시내를 걷던 바울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적힌 바로 그 제단을 보았습니다. 아덴 사람들이 모이는 공적인 연설 장소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 바울은 그 제단을 언급하고는 아덴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종교적 열심에 대해 자신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했습니다.
사도행전 17:22하-31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바울은 그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어서 얻게 된 기쁨과 행복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면서 세상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일에 평생을 바친 사람입니다. 그러한 바울이 그리스 아테네에 도착하여 그곳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가르쳤던 것입니다.


인간의 기원, 생물로서의 인류가 공동체별로 향유하는 문화의 특징 등을 연구하는 학문을 인류학이라고 부릅니다. 창세기 2장 14절에 나타난 인류학 관련 내용을 보면, 인간의 기원은 유프라테스 강 근처, 이스라엘 땅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이고, 오늘날의 터키 지역쯤에 해당합니다. 그곳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셨고, 인류는 동서남북으로 이동하여 전 세계에 퍼졌습니다. 역사의 진행을 따라 유프라테스 지역을 벗어나 이집트로 인도로, 중국으로, 만주로, 한국으로, 일본으로, 러시아 땅을 지나 알래스카, 캐나다, 미국, 멕시코 등지로 퍼져나간 것입니다.
사람이 지면에 번성하여 퍼지면서 종교도 함께 확산되었습니다. 인간의 능력보다 높은 능력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 인간과 주변 세상 전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지닌 사람은 옛날부터 많이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며 언어 역시 발전하고 변천했습니다. 그러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일컫는 이름도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예배 형태도 변했습니다. 그런데 예배 방법 면에서 일어난 변화는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해서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한반도에 전해오는 건국 신화에서는 나라를 처음 세운 이가 단군이라고 말합니다. 제주도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속에서는 삼성혈(三姓穴) 또는 모흥혈(毛興穴)이라고 하는 세 개의 구멍에서 고을나(高乙那)·양을나(良乙那·梁乙那)·부을나(夫乙那)라고 하는 세 신인(神人)이 솟아났다고 말합니다. 이 사람들이 탐라국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건국 신화에 보면 그 주인공들이 ‘처음부터’ 그냥 ‘존재했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미개한 사람들이 살고 있거나 아예 사람이 살지 않던 지역에 신과도 같은 사람이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천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화 속에서조차도, 존재의 출발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유일한 예외는 하나님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시간이라는 개념을 초월하여 자존(自存)하시는 분입니다.
웅장한 산과 작은 나무, 커다란 바다와 잔잔한 시냇물―이 모든 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힘이 있다는 믿음은 인류가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사람 속에는,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 풍성한 수확이 이루어지게 하는 모종의 힘이 편만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근본적인 이해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농경 사회에서는 어느 나라를 가든 씨를 뿌릴 때와 곡식을 거둘 때에 맞추어 커다란 잔치가 벌어집니다. 그 모든 행사는 자기보다 위대하시다고 모든 인류가 인정하는 절대자에게 복을 빌고 감사를 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기본적 이해를 선천적으로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그 영(혼)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요?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본질적 존재에 대한 인식은 우리를 처음 질문으로 되돌아가게 합니다. 그 질문은 내 안에 영(혼)이 존재하게 하신 분, 여러 나라에서 수많은 사람이 경외하는 대상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여호와라고 부르며 경외하는 이 신(神)은 누구실까요? 햇빛과 비, 더위와 추위가 있게 하고 농작물과 나무와 물고기와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통치자는 과연 어떤 분이실까요? 인간에게 내재하는 느낌과 재능과 갈망을 주셨고 죽음 이후에 이어질 삶까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그 분은 도대체 누구실까요?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여호와 하나님을 칭했던 사람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사람들은 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분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러왔습니다. 지구상에 처음 존재하던 사람들의 언어로 그분의 이름을 무어라 발음하여 불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도 단정적인 답변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지런히 연구하여 추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야훼’라는 발음이 더 정확하지 않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지금은 많은 학자들이 ‘야웨’와 ‘야붸’의 중간 소리 정도였을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지구 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고 얼마의 세월이 흐른 후, 하나님께서는 한 민족을 택하시고 인류 역사 속에서 섭리하는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게 선택된 민족을 성경에서는 이스라엘 족속, 히브리 사람 등으로 부릅니다.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분의 이름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 거룩하신 이름을 입에 올리거나 적는 일을 삼가는 경건한 사람들도 생겼고, 언어학적인 이유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다양한 방식으로 발음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직접 언급하는 일을 조심스러워 하는 경건한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그냥 ‘주님’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점에 대해 대한성서공회 발행 새번역 성경전서 서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 히브리어의 네 자음 문자는 아도나이(주) 또는 옐로힘(하나님)으로 읽어 왔다. 신약성경을 쓴 사도들은 하나님의 이름 네 글자를 쓸 때에는 예외없이 ‘주’라고 하였다.” 가톨릭에서도 2005년판 성경부터는 ‘야훼’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그냥 ‘주님’으로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이름이 통일되어 있지 않다는 현실에 대해 크게 문제를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 이름과 관련된 철자법과 발음법이 정확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분의 속성과 능력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그분을 합당하게 경외하는 일에는 아무런 지장도 받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사실, 따라서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시다는 사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복음을 오늘날 우리가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 등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구원에 꼭 필요한 문제는 하나도 빠짐없이 우리에게 전달되어 있습니다.
러시아의 이전 이름은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이었고, 줄여서 소련이라고 불렀습니다. 소련은 유물론에 입각한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여서 신(神)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강하게 부정했습니다. 그 소련의 우주인 한 사람이 로켓을 타고 높이 올라가 지구 밖의 공간까지 다녀와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습니다. “[우주 공간에서] 나는 신을 볼 수 없었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한 미국 우주인이 지구 밖으로 나가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지구와 달과 태양을 포함한 수많은 천체를 눈으로 보고, 그 모든 것들이 질서를 이루고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하고 돌아온 그 사람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어느 곳에서나 역사하시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앞에 소개한 대조적인 두 사람의 경우를 보면, 주변의 만물은 동일했지만 한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기 원하지 않았고 또 한 사람은 간절히 만나고자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가짐의 차이가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불러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원하기만 하면 그 증거는 사방에 있습니다. 사람 속과 사람 밖에서 보이는 것,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것, 현미경으로 관찰할 수 있는 모든 것 등을 통해 하나님 존재에 대한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눈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많은 과학자들이 동의하는 사실은 그것이 우연히 생겨날 확률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은 설계된 것, 즉 창조된 것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눈이 멀고자 결정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진리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고 받아들일 생각도 없기 때문에, 생명이 어디서부터 온 것이고,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 등은 ‘불가지(不可知)’의 영역에 두고 더 이상 문제를 삼지 않기로 스스로와 타협하게 됩니다.
우리는 지구라는 이름의 행성에 살고 있습니다. 지구는 태양계의 일부로서 태양 주위를 돕니다. 지구가 속한 태양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질서와 설계가 담겨 있습니다. 모든 행성이 자기 궤도를 유지하고 있기에 서로 충돌하는 일이 결코 없습니다. 여러 행성이 적당한 속도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태양 주위를 돕니다. 지구와 태양의 위치 관계에 따라 낮과 밤과 계절이 생겨납니다. 지구는 태양과 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만약 지구가 태양에서 조금이라도 더 멀어진다면 우리는 탱탱 얼어붙을 것이고, 조금이라도 더 태양 쪽으로 가까이 간다면 타 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태양계 외에도 수많은 다른 태양계가 우주에 존재한다고 과학자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우주가 몇 개의 차원으로 되어 있는지조차 확실히 알지 못합니다. 망원경으로는 우주의 가장자리를 관측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사고 능력으로는 우주의 폭을 가늠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우주에 관해서 알지 못하는 것이 많지만, 우주와 관련하여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그것은 우주가 질서와 설계를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주는 우연히 발생한 것도, 혼돈 상태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주는 통일되어 있고, 조직되어 있습니다.
우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할 때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둘 중 하나입니다. 곧 우주는 창조되었거나 우연히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우주가 우연히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 어떤 존재도 없는 상태에서 우주가 생겨났다고 결론을 내리거나, 이전에 존재하고 있던 물질이 모종의 우주적 폭발을 일으킨 결과 우주가 생성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주 존재 기원에 대한 두 가지의 결론을 놓고 보면,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우주가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사유하는 사람이 어떻게 아무런 원인도 없이 우주가 그냥 생겨났다고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어떻게 우주적 규모의 대폭발이 일어난 결과 우주가 생겨났고 최초부터 존재한 것은 물질뿐이었다고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1
어떤 사람이 필자에게 와서 전기 면도기를 건넸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 사람은 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면도기를 좀 보세요. 전기 코드를 아래쪽에 연결하면 전기 에너지로 기계를 작동시켜 면도를 할 수 있습니다. 얼굴 피부를 칼날에 베이지 않으면서 수염을 깎을 수 있지요. 면도기 아래쪽 내부에는 배터리가 들어있습니다. 전기 콘센트에 플러그를 연결해 놓으면 전기 에너지가 배터리에 저장되어 나중에도 쓸 수 있게 됩니다. 충전한 다음에는 전기 콘센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면도기를 켤 수 있습니다.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지 않아도 작동이 되지요. 댁에서 사용하실 수도 있고 여행 중에도 사용이 가능합니다.” 필자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정말 쓸모 있는 물건이로군요. 여행을 자주 하는지라 이런 물건은 제게 아주 유용할 겁니다. 이 면도기하고 비슷한 것을 하나 구입할 수 있는지 알아보아야겠군요.”
그런데 그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상상해 보세요. “아이고, 어쩌지요? 이 면도기는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든 것이 아니거든요. 그냥 생겨난 겁니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공장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는 온갖 종류의 재료를 보관하고 있었습니다―플라스틱, 금속, 목재 등등을 보관했지요. 그런데 그 건물에서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공장에 보관되어 있던 재료들이 공중으로 날아올랐지요. 그런데 공중에 떠 있는 동안, 조각난 재료들이 어찌어찌 해서 한 곳으로 모이더니만 얼마 후에 이 면도기가 되었습니다. 폐허가 된 공장 건물 잔해 속에서 우리는 이 면도기를 발견했습니다. 설계한 것도 아니고 공장에서 생산한 것도 아닙니다. 이번에 일어난 폭발의 결과 생겨났지요.” 이 말을 듣고 필자는 아마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이 면도기가 설계한 것도 아니고 기술자의 손으로 섬세하게 조립한 것도 아니라는 얘기를 지금 저보고 믿으라는 말씀입니까? 지성을 갖춘 존재가 면도기를 만든 것이 아니라 혼돈 속에서 면도기가 우연히 생겨났다고 단정 짓는 겁니까?”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폭발 결과 면도기가 생겨난 것이라고 계속 주장한다면 필자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말할 것입니다. “이 면도기에 대해 오해하신 게 분명하군요. 그런 식으로 면도기가 존재하게 된다는 건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필자는 완전한 확신을 갖고 그 사람에게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제 사고력의 한도 내에서는 그 어떤 다른 결론도 이끌어낼 수 없을 것입니다.2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선포했습니다. “창세로부터 그(분)[=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로마서 1:20). 또 바나바와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사도행전 14:17).
그리스도인은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피조물임을 믿습니다. 공동체에서 법은 아주 중요한 것이지만, 제도 역시 사람을 위해 만든 것일 뿐 사람이 제도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마가복음 2:27).
하나님께서 사람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시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소중한 아들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써 인간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모두를 위해 생명을 내어줌으로써 죽음 너머까지 이어지는 소망을 갖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참되게 경배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고, 사랑, 평화, 일치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자기 자신과 평화를 누리는 방법까지 배우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자기 문화와 정서에 맞는 나름대로의 신(神)을 창안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교훈을 떠나 교리를 세우고 숭배함에 따라, 오늘날 인류는 여러 신을 섬기고 있고 수많은 종파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고 승천하신 지 2,000여 년이 지난 지금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일치가 존재하지 않고 평화가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바른 교훈을 벗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슬픈 현실은 복음을 전파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주님께서 하나됨을 위하여 기도하셨고, 사도 바울 역시 성령의 하나됨을 힘써 지키라고 간청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요 17:11; 엡 4:1-6).
그런데 평화는 일치의 결과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모두 형제자매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이루어내는 평화는 거짓 평화일 뿐입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를 누리자는 말는 얼핏 듣기에는 그럴듯하지만 앞뒤가 맞지 않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신 방법과 절차를 통해서는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수조차 없는데 어떻게 모든 가르침을 수용하며 일치를 이룬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은 자존(自存)하십니다(출 3:14). 창조주이신 그분,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사랑과 평화와 일치를 원하십니다. 소망을 갖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내면에 자리한 그 희망이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신 것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우리가 그분과 대화를 나누기를, 즉 모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면서 어려운 일을 고하고 보살피심을 간구하기 바라십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창조하여 존재하게 하시고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아시고 적절한 때에 적절한 것을 주십니다. 주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선한 사람에게는 물론이요 악한 사람에게도 햇빛이 비치게 하시고 적절한 때에 비가 내리게 하십니다(마 5:45). 지구를 만들어 삶의 터전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넘치도록 공급해 주심으로써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 주십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서로 다투고 죽이기까지 하는 인간 세상으로 그분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봅니다. 인간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경이로운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면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이제 우리도 사랑을 표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먼저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신약성경부터 읽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신약성경은 이스라엘 민족을 넘어서 현재와 미래의 세대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보면 볼수록 흥미로운 책입니다. 신약성경을 읽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각 지역에서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께 순종할 수 있도록 돕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여러분이 구원의 조건에 합당하게 순종할 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교회 지체가 됩니다. 성경에 입각하여 말하고 행하며 가르치는 가까운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도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따르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까운 곳에서 발견하지 못하여 집에서 교회를 시작하기 원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관련 전도지의 내용을 더 읽어보시고, 그 내용을 성경에 비추어 상고한 다음, 성경으로 안내하는 신실한 전도자에게 연락을 취하도록 하십시오. 우리 선교회에서도 기꺼이 도움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Copyright ⓒ 2001, 2010 Church of Christ Mission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회). 전도지 내용은 자유롭게 인용하시되,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이 문서에 사용한 성경 본문은 대한성서공회 발행 개역개정판(2005)입니다. 읽기 편하도록 우리 선교회 편집부에서 문장 부호를 삽입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누구신가?
초판 제목 / 여호와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인터넷판 초판 / 2001년 5월
인터넷판 개정 / 2010년 7월
발 행 / 그리스도의 교회 출판사
서울 강서구 화곡6동 신학대길 63
02) 2607-0645 | http://christ.or.kr
편 저 /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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