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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Admin 2014.07.06 21:27 Views : 633 Recommend: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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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사도행전 3:1-10
사도행전 3장은 제자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고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고쳐 준 사건은  신약 교회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었으며 동업자였습니다( 마 4:18 ; 눅 5:10).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함께 부르심을 받았고 언제나   주님의 측근에 있었던 제자들입니다( 마 26:37 ; 막 5:37 ; 9:2 ; 14:33).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베드로는 그의 적극적인 믿음으로, 그리고 요한은 사랑과 심오한 신학적 사상으로 초대 교회의 중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은 대조적이지만 또 잘 조화가 되었습니다. 본문에 나타나 있는 대로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도 함께 하러 갈 만큼 친근했습니다.          본문에는 '기도'와 '성전'과 '신유'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선교'와 연결되어 있습니다(행 4:4).

  1. 기도하러 가는 사도 베드로와 요한
  
1) 기도하는 시간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들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쌔'(1절).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하루에 세 번씩(단 6:10 ; 시 55:17). 제 3시, 제 6시, 제 9시(현재 시간으로는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에 기도 했습니다. 기도하는 장소는 성전, 회당, 그리고 자기 집 옥상 같은 곳이었습니다. 제 9시의 기도 시간은 성전에서 저녁 식사를 드리는 시간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이 구약 교회의 제사 드리는 시간에 기도하러 성전에 감으로써 신약 교회와 구약 교회의 연계성을 시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 교회는 구약 교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신약 교회의 지도자들은 구약 교회에서처럼 짐승을 잡아 봉헌하는 제자 대신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그들의 본분을 삼았습니다(행 6:4).

  2) 기도하는 장소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가는 곳은 '성전'입니다. 신약 교회에 있어서의 '성전'은 기도하는 장소이며 예배하는 장소이지 구약 교회에서와 같이 제사드리는 장소는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전에서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모여 교육하고 예배드리고 친교를 했습니다(행 2:42, 46). 예수께서는 당신의 몸이 곧 성전이라고 하셨으며(요 2:21), 바울은 성도의 몸이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고전 6: 1). 그러므로 신약 교회에 있어서의 건물로 된 '성전'의 개념은 다만 '만민이 기도하는 집'(마 21:13 ; 사 56:7)이며, 예배드리는 집으로서의 의미만 갖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그들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러 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그들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을 향해 있었다는 것과 그러한 생활을 통하여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공급받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2. 성전 밖에 있는 앉은뱅이
  1) 날 때부터의 앉은뱅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2절).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만난 사람들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불구자와 그를 메고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40여 세가 된 사람이었습니다(행 4:22). 그는 출생 이후 지금까지 남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바로 모든 인간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죄의 저주 아래 놓여 있으며 출생시부터 죽음에 이를 때까지 남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이 앉은뱅이와 같이 모든 사람들은 그 삶의 시각을 '사람'에게 두고 있습니다. 남편을 보고 살고, 아들을 보고 살고, 상관을 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앉은뱅이의 40여 년 간의 불행한 삶은 바로 그가 하나님을 쳐다보지 않고 사람만을 바라보고 살아왔다는 데 있습니다.

  2) 성전 미문 밖에서의 구걸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12절). 앉은뱅이가 날마다 구걸하는 장소는 성전의 미문이라는 문 밖이었습니다. 성전 문 밖과 앉은뱅이와 구걸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밖에 있는 사람은 저주받은 앉은뱅이와 같고 그러한 사람의 삶은 구걸하는 삶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3. 신약 교회의 능력의 원천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6절).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구원시킨 것은 돈의 힘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약 교회의 시작이 돈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름'은 '존재', '속성', '능력' 등을 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저주 받은 삶을 구원시킬 수 있고 구걸하는 삶으로부터 주는 삶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은총이 있습니다. 이것이 신약 교회의 본질이며 그 선교의 핵심이었습니다. 그것이 곧 복음입니다.

둘째 무슨 일이 얼어났나요?(사도행전 3:7-11)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부터 예루살렘 거리에는 새로운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였습니다.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권능을 힘입은 제자들이 이전과는 달리 예수의 부활과 하나님의 복음을 힘차게 증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들 중에서도 주역이라 할 수 있는 베드로와 요한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맞춰 성전의 미문을 통과하려 할 즈음에 본문에 기록된 바와 같은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1.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뛰어 서서 걸으며'(8절).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이며 지금 그의 나이는 40여 세가 되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참조, 행 4:22). 그런데 그가 앉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현대의 의학적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기적'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즉 상식으로 생각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는데 있어서 다음과 같은 방법과 목적을 가지십니다.

  1) 사람을 통해서 베푸십니다.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7절). 하나님께서는 주로 당신의 종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수많은 선지자를 세우셔서 당신의 메시지를 전해 오셨습니다. 이것은 기적을 베푸는 데 있어서도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얼마든지 그때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를 통해서 과부의 아들을 살려 주시고( 왕상 17:8-24), 엘리사를 통해서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 주셨는가 하면(왕하 5:14 ; 눅 4:17), 사도 바울의 손을 빌어 병자를 일으키셨습니다(행 14:8 -10). 본문에서도 역시 베드로의 손을 빌어 앉은뱅이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하나님께서는 매우 자주 당신의 신실한 종들을 통하여 기적을 베푸십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푸십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6절). 하나님의 자녀들이 행하는 일은 그것이 크든지 작든지 모두 에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모두 옛사람, 즉  죄된 나의 몸을 십자가 밑에 장사지내고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어 다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의 이름을 통해서만 하늘의 모든 축복과 은총이 우리에게 임할 것이라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축복의 근원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사역만이 주께서 인정하시며 그의 이름이 전제된 사역만이 진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니'(8절).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시며 또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우리들에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권고하셨습니다( 마 5:13-16).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심도 그 궁극적인 목적은 당신의 영광을 위함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역사를 통한 기적의 현장에는 반드시 하나님께 영광 돌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하나님께서 받아야 할 그 영광의 자리에 어느 특정한 사람이 대신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슬픈 일입니다. 신앙인은 오직 어떠한 큰 일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나는 다만 무익한 종이라'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2. 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1)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십니다.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앉은뱅이, 이렇게 셋만 있던 그 자리에 갑자기 수많은 군중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오천 명이나 믿는 자가 생겼습니다(행 4:4). 교회가 형성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베드로나 요한이 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세상의 많은 사람들 중에서 당신의 백성을 골라내시어 당신의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래서 '교회'를 헬라어로 '에클레시아' 즉 '불러냄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렇듯이 오늘날에도 교회를 세우는 모든 사역자들은 다만 심부름꾼에 불과합니다.

  2) 교회는 구원을 베푸는 곳이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그래서 한 결 같이 구원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교회가 할 일 중 가장 큰 일은 '구원을 베푸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그분은 이 흑암 중에 있는 세상에 구원을 가져오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가 인간의 철학을 전하고, 사상을 논하며,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볼 때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아직도 구원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는 영혼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들의 구원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luciahttp://www.stpaulchong.org/?document_srl=145152010.02.16 20:24:16 4291. 시몬 베드로: '시몬'은 '듣는 자', 또는 '복종'을 뜻하며, '베드로'는 바위라는 뜻이다. 그는 가파르나움 사람의 후예로서 베세이다의 어부였으며 요나의 아들로서 안드레와 형제였다. 그는 최초로 부름 받은 중요한 제자들 중의 하나이며,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최초로 천국을 연 사도였다. 그는 사도로서, 광범위하게 여행하였고 신약성서에 포함된 두 서신을 썼고 끝내는 순교하였다.

2. 안드레아: '안드레아'란 '남자답다'는 뜻을 가진다. 베드로의 형제로서 베세이다의 어부였고 요한의 제자인 한 사람이었다. 그는 최초의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가 생각되며 다른 형제의 개종에 공을 세웠다. 그의 사도로서의 공적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으며, 아가야 지방의 [파트레]에서 십자가에 달린 것으로 전해진다. (일설에 그는 감히 주님과 같은 십자가를 질 수 없다고 하여 X형 십자가를 선택했다고도 전한다.)

3. 야고보: '대신 들어앉다'는 뜻의 이름이며 부친은 제베대오, 형제로는 요한이 있다. 그는 갈릴리의 어였으나 최초로 부름 받은 예수님의 제자 중의 하나가 되었고 총애를 받았다. 헤롯에 의해 사도들 중에서 최초로 죽었다 (행 12: 1).

4. 요한: 이름의 뜻은 '하느님의 은혜'이며, 야곱의 형제로서 갈릴레이의 어부였다. 비교적 초기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충실히 따랐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였고 사도로써의 행적은 풍부하다. 제 4 복음서와 세 서신을 기록했으며 계시록도 기록하였다. 그는 일찍이 에베소에서 죽은 것으로 추측된다.

5. 필립보: '필립'이라는 말은 '투쟁적'이라는 뜻이며, 그도 역시 베세이다의 어부였다. 초기에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나타니엘에게 그에 관해 얘기했다 (요 1: 45). 그의 사도로서의 행적이나 죽음에 관해서는 확실한 것이 알려져 있지 않다.

6. 바로톨로메오: '탈마이의 아들 (Son of Talmai)'이라는 뜻이며 여러 가지 점에서 나타니엘과 동일인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게 하고 있다 (요 1: 45). 그는 아라비아와 아르메니아에서 전도한 것으로 추측되나 그의 사도로서의 행적과 죽음에 관한 확실한 것은 알려진 바 없다.

7. 도마: '도마'라는 말은 '쌍둥이', 또는 '소리'를 뜻하며, 그는 '디두모스 (Didymus)'라고도 불렸다. 안디옥 출생으로서 그에 관한 기록은 요한복음에서만 얻을 수 있어서 그의 사도로서의 행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페르시아에서 전도하고 에뎃사에서 죽은 것으로 믿어진다.

8. 마태오: '여호와의 선물'이라는 뜻의 이름인데 그는 또한 '레위'라고도 불렸으며 예수께서 부르시기 전에는 가파르나움의 세리였다. 그는 제 1 복음의 기록자이며 그의 다른 행적에 관한 전설은 많으나 확실치 않다.

9. 야고보 (알패오의 아들): '주님의 형제'라고도 불리며, 예루살렘에 교회를 세운 뒤에 그 운명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야고보서의 저자이다. 일설에, 그는 서기관과 바리사이인들에게 의해서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 뜨려진 후에 곤봉으로 맞아 죽었다고 한다.

10. 유다 (야고보의 아들): 타대오 (막 3: 18)와 동일인이며 유다서의 저자로 추측된다. 사도적 행적의 기록은 아직 없다.

11. 시몬 (가나안 사람): '셀롯'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그가 "Zealots" 당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세의 의식을 맹신적으로 지킨 사람들이다. 사도로서의 행적에 관한 기록은 없다.

12. 유다 (가리옷): "유다"는 '찬양하다'라는 뜻의 이름이다. "가롯"은 유대 지방의 지명인 듯하다. 그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제자들 중의 회계였으며, 전도하거나 다른 제자들처럼 이적을 행한 것 같지는 않다. 주님에 대한 그의 반역은 영원히 그의 이름을 유명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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