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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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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정탐과 보고
민수기 13:1-33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바란 광야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하여 정탐꾼을 보냅니다. 정탐꾼이란 적의 상황을 몰래 살피는 오늘날의 간첩과 같은 것입니다. 바란 광야는 시내 산으로부터 240㎞, 그리고 가나안의 남쪽 헨란이라 할 수 있는 브엘세바의 남쪽 80㎞ 지점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정탐꾼을 가나안 땅으로 보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왜 정탐꾼을 보내시는가?
하나님께서 왜 정탐꾼을 보내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조상 아브라함 때부터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기업의 땅"으로 주시기로 약속한 "약속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창 12:7, 15:18). 그렇습니다. 가나안 땅은 "기업의 땅"이며 동시에 그것은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출애굽의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목적지는 가나안입니다. 하나님은 이 목적지까지 인도하시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구름기둥으로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인간이 죄에서 해방(출애굽)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영생(가나안)에 이르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영원한 기업의 땅, 영원한 약속의 땅인 주의 나라에 이르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 모든 성도들을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으로 율법과 복음으로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정탐꾼을 보내시는 것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오늘 이 세상을 정복하기 위하여 정탐꾼으로 보내심을 받은 것은 바로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입니다.

2. 정탐꾼의 선발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좇아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두령들을 정탐꾼으로 선발했습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의 정탐의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말해 주는 것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바야흐로 하나님의 "약속의 땅"문턱에 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거의 630년이란 세월이 흘러간 시점에 그들은 비로서 여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게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400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정치할 지며, 그 후에 네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어 나오리라. … 네 자손은 4대 만이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창 15:13-16) 고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때가 이르렀던 것입니다. 실로 역사적인 순간 앞에 그들은 서 있었습니다. 이 약속의 땅을 정복하기 위하여 정탐하는 일에 아무나 보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민족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족장(두령)들을 선발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렇게 한 모세의 훌륭한 의도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로, 열두 지파의 족장을 정탐꾼으로 선발한 모세의 의도는 하나님의 명령 준행함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각 지파의 족장들은 그 지파에서 존경을 받는 인물들로서 그들의 영향력은 막강했습니다. 그들을 정탐꾼으로 선택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뜻)을 신중하고, 철저히 그리고 책임 있게 수행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이스라엘에 있어서 가나안 땅의 정복은 오랜 민족적 숙원이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총력전이 필요했습니다. 총력전은 민족의 단합 없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열두 지파가 다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그 일은 정탐할 때부터 그렇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는 민족적 중대사에 모든 지파가 다함께 동참하게 하고 다함께 책임을 지도록 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할 때 가져야 할 신중성, 동참 의식 그리고 책임감에 대하여 배워야 합니다.

 3.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가나안 땅을 기업의 땅으로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왜 그 문 앞에 다다라서 정탐을 하라고 명하셨느냐는 점입니다. 정탐하지 않고 쳐들어가면 안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시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 사람은 언제나 사람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일을 하실 수는 없는 것이며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이 우주의 질서는 파괴될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됩니다. 아담의 비극은 그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한 데 있습니다 (창 3:5).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의 한계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을 "기업의 땅", "약속의 땅"으로 허락(계획)하신 것을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 땅을, 그 약속을 쟁취해야 할 일은 사람의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사람은 그 약속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계획하시고 인간은 실천합니다. 하나님은 원리를 세우시고 인간은 그것을 구체화합니다. 하나님은 주관하시고 인간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체이시고 인간은 객체입니다. 목표를 지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고 그것을 달성하는 것은 인간의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정탐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 언제나 인간은 인간의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사명(民數記 13:17-20)
1. 정탐꾼의 사명
모세로부터 부여받은 정탐꾼들의 사명은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습니다.
1)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거민의 실태를 탐지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수효, 성격, 풍습 그리고 그 사회의 조직력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거민의 강약과 다소"라는 말 속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냐?"하는 것을 알아내는 일은 전쟁에 있어서 극히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적을 알아야 이긴다는 것은 병법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2) 가나안 땅에 대한 관찰 임무였습니다.
즉 비옥한 땅인가,
아니면 메마른 땅인가를 관찰하는 일입니다. 거기에는 수목의 분포 상태도 포함되었습니다. 이것은 그 땅이 농업에 적합한 땅인지, 목축에 적합한 땅인지를 알아내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점은 앞으로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 민족의 생업과 직결되는 문제였습니다.

3) 그 다음은 가나안의 성읍들이 진영인지, 산성인지를 알아내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가나안 사회가 요새화되어 있느냐 아니냐 하는 점을 파악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외부의 침입에 대하여 어떻게 준비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안다는 것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방비가 잘 되어 있느냐 아니냐 하는 점은 전쟁의 승패를 가름하는 조건이 됩니다.



4) 마지막으로 그들에게는 그들이 정탐한 증거물로서 그 땅에서 생산되는 과일을 가져오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추상적인 보고를 방지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정탐 임무는 그만큼 현실적이고 정확해야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도자 모세의 용의 주도한 일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정탐 임무에 있어서 경계해야 할 요소는 추상적인 것과 허위성입니다. 모세는 이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이 명령을 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2. 담대하라
모세는 정탐꾼들엑 '담대하라!' 고 했습니다. 용기와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참 용기와 최선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진정한 용기가 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을 때 우리는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임무를 맡기실 때는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믿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수 1:5, 6),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8-20). 위대한 임무일수록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3.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사명
이러한 중요한 임무들이 정탐꾼들의 사명으로 주어졌다는 것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사명을 일깨워 주는 좋은 교훈이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의 가나안은 오직 주님께서 계신 그곳이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궁극적으로 오직 그 목적지만을 위하여 전진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복이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던 것과는 달리, 성경 말씀을 통하여 하늘의 가나안에 대한 정보를 알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하여 사람을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1) 가나안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하늘나라 가나안의 모든 정보를 가지고 우리에게 직접 오셨기 때문입니다.
은혜 시대의 우리는 정탐꾼을 우리가 보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께서 하늘의 가나안 소식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실로 이 얼마나 큰 은혜이며 얼마나 큰 사랑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인카네이션!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 그것은 바로 하늘의 소식입니다. 천상 가나안의 소식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구원의 소식입니다. 영원한 기업에 대한 보증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다시 오셔서 하늘의 가나안으로 우리를 인도해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려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네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 3).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은 이 소식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가르치는 일입니다. 지켜 행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꾸준히 주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하늘의 가나안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두 구룹의 보고(25-30)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정탐꾼들은 40일간의 정탐을 마치고 바란 광야 가데스에 돌아와 온 회중 앞에서 그들의 정탐 활동을 보고했습니다. 이들의 보고야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온 회중은 극도로 긴장하여 정탐꾼들의 보고에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커다란 혼란이 왔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열 명의 정탐꾼과 두 명의 정탐꾼의 보고가 서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 보고가 어떻게 달랐으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다수의 보고와 소수의 보고
        열 지파의 정탐꾼들의 보고는 가나안 땅의 토질과 생산물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것이었으나, 그 땅을 공략함에 있어서는 부정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땅의 거민들이 장대할 분만 아니라 성읍들은 견고하고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두 지파의 정탐꾼들은 공략하면 승리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갈렙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그러나 부정적인 주장을 하는 자들은 계속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처음과는 달리 가나안 땅을 악평하여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 하고, 그 땅의 백성들은 모두 다 장대한 대장부들이고 자기들은 메뚜기떼와 같이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열 사람의 부정적인 주장과 두 사람의 긍정적인 주장이 맞서게 된 것이며 이런 경우 인간의 역사는 대개 다수가 주장하는 편으로 흘러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어느 편의 주장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주장이며 이스라엘 참길로 인도하는 주장인가 하는 데에 있습니다.

2. 두 주장의 상반된 시각
        열 정탐꾼들과 두 정탐꾼들이 다른 보고를 하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열 정탐꾼은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장대한 거민과 견고한 성읍만을 보았고 두 정탐꾼들은 거기에서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   ( 민 14:7-9). 이 시각의 차이는 곧 부정적인 보고와 긍정적인 보고를 낳게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물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부정적일 수도 있고 긍정적일 수도 있다는 교훈을 얻게 되고 이 상반된 사고는 곧 상반된 운명을 낳는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물 위로 걸어오시던 주님께서 "오라"(마 14:29)하실 때 물 위로 걸어가던 베드로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할 때는 빠져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눅 5:6)그물을 내렸더니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열 정탐꾼들은 사물의 현상만을 보고 하나님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시리라는 약속을 전혀 도외시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지 않으면 현실은 공포로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사물(현실)은 언제나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들면 사물(현실-풍랑)은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현실-물고기)있어집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 신앙의 비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나타난 가나안 땅의 모든 현상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기에 적합한 상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조상 아브라함 때부터 약속하신 기업의 땅을 얻을 때가 바로 이때라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어떠한 현실적인 장액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능히 그 모든 것을 물리치고 당신의 뜻을 이루실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 될 수도 있고 '거민을 삼키는 땅'이 될 수도 있으며, 그 땅의 거민들이 '밥'이 될 수도 있고 '대장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3. 다수의 길과 진리의 길
        인간의 제도 중에 가장 합리적인 것은 다수의 의견을 좇아 모든 일을 해 나가는 다수결 존중 제도입니다. 이것을 정치적으로 민주주의 제도라고 해서 근대 국가의 이상적 정치 제도로 각광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 다수결 원리가 일단 종교적 차원으로 넘어올 때 그것은 대개의 경우 반종교, 반진리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다수결 원리는 인간 세계에 있어서는 합리적이지만 진리의 세계에 있어서는 불합리한 원리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결코 타협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진리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독단이고 계시이며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진리는 오직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다수결 원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게 한 것은 다수결 원리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다수는 언제나 하나님의 편이 아닙니다. 소수만이 하나님 편에 서서 이 다수와 싸웠습니다. 그 소수가 누구입니까?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다수와 싸우는 그리스도의 군사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좁은문, 그 좁은문 안에 진리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14:1-10)
열 명의 정탐꾼들의 보고를 들은 백성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의 호소를 묵살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 14:3). 가나안 땅으로의 목적 의식이 동요를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목적 의식이 흔들리게 되면 거기에는 반드시 불평과 불만이 고조되게 마련입니다. 지도자 모세와 아론은 속수 무책으로 그 백성들 앞에 엎드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태에 개입하시지 않았다면(민 14:10)아마도 지극히 위험한 파국적인 사태가 벌어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장관을 세워 애굽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신앙의 길과 불신앙의 길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음
1) 현재의 고난 때문에 미래에의 목적 의식을 잃어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적지인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그 땅의 정복에 따르는 고통 때문에 가장 용기를 필요로 하는 시기에 그들은 목적 의식을 잃고 동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창조적인 일은, 고통을 수반하지 않고는 결코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잊고 있었습니다. 고통은 창조의 어머니입니다.
2) 현재 난관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재의 난관 때문에 과거의 하나님께서 기사와 이적으로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한 것 등의 은혜를 잊고 있었습니다. 현실적인 난관이 그들의 신앙을 어둡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풍랑 때문에 물 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지 못하고 물속으로 빠져 버렸습니다. 우리에게 오는 시련은 믿음을 잃어버리게 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연단하기 위해서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벧전 1:7).
3) 현재의 시련 때문에 과거로 돌아가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자!"(민 14:4)고 부르짖은 것은 노예 근성을 버리지 못한 데서 왔습니다. 430년간이나 애굽의 노예 생활을 하면서 은연중에 마음속에 배어 있는 이 노예 근성, 이것이 애굽을 그리워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시련을 헤치면서 창조적으로 살아갈 독립적 자유 의지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시련을 헤치면서 창조적으로 살아갈 독립적 자유 의지보다 학대를 받으나 유족한 노예로 살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가 있는 곳에 생명이 있고 예속이 있는 곳에 죽음이 있습니다. 생명의 의미는 자유함에 있습니다.

2. 불신앙이 가져오는 결과
1) 불신앙은 불안을 가져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잃어버렸을 때, 그들에게는 끝없는 불안이 찾아왔습니다. 죽음과 멸망이 그들의 눈앞에 어른거렸습니다(민 14:2, 3). 그리하여 그들은 밤새도록 부르짖으며 통곡했습니다. 믿음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이렇게 비참한 것입니다. 믿음은 소망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잃으면 절망입니다. 죽음입니다. 멸망입니다.
2) 불신앙은 불평을 가져옵니다.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이 불평 속에는 지도자에 대한 신뢰가 없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장관을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신의를 배반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인간에 대한 바른 신뢰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참다운 인간 관계는 참다운 신앙에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인간을 믿는 것은 하나입니다.
3) 불신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시는고?" 이 원망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삶의 참 기쁨과 만족은 신앙 안에 있고 하나님 안에만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면 만족 대신에 불평과 불만이 우리를 덮쳐 버리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의 눈으로 이 세상을 보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는 우리가 만족하고 편히 쉴만한 곳이라 단 한군데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직 주님에게만 오직 하나님에게만, 만족과 평안이 있습니다.

3. 신앙과 용기
1)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의지해야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신앙과 용기를 가지고 백성들을 안돈시키려 했습니다. 그들은 옷을 찢으며 담대히 말했습니다,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이것은 신앙입니다. 인간들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기업의 땅으로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더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므로 능히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거민들을 '밥'으로 만들었으며, 그들의 보호자가 그들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이미 만들어 놓았다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용기야말로 하나님께서는 주시는 능력입니다. 참된 용기는 신앙에서 비롯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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