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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여기가 좋사오니

Admin 2014.11.30 17:40 Views : 740 Recommend:38



http://www.kchurchofchrist.com/pdf/113014.pdf여기가 좋사오니
마티복음 17:1-13
    본문은 변화산에서의 신비한 체험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변화산이란 산은 없습니다. 다만 산위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화했기 때문에 우리가 변화산이라고 부릅니다 실제로는 이 산이 어느 산이었는지는 성경에는 기록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아주 높은 산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데리고 산위로 올라가셨습니다. 누가는 주님이 기도하시기 위해 산에 올라가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세명의 제자에게 기도에 관한 훈련을 특별히 시키시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산위에서 주님의 모습이 변형되셨습니다. 어떻게 변형 되셨냐하면 그 옷이 광채가 나고 아무리 빨래를 잘해도 도저히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희게 변한 겁니다. 본문에는 옷만 변형된 것 같지만 이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에는 얼굴이 빛났다고 하고 누가복음에는 용묘가 변화 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얼굴과 옷에서 다 같이 광채가 나고 심히 횐옷을 입게 됩니다. 사람이 산위에서 이렇게 변하면 우리는 신선이 되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동양식으로 보면 주님은 지금 신선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 산위의 광경은 세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누가복음 9:29절에 보면 기도하러 산에 올라 가셔서 기도하실 때에 모습이 변형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시지만 그가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기도할 때에 비로소 그 모습이 변회되었다는 사실을 봅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기도함으로 능력을 나타내고 기도함으로 변형되고 기도함으로 시험을 이긴 사실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합니까?
    성도는 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실 때에 모습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기도해야 할 것을 나타내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매우 중요합니다. 필수 적입니다
마태와 마가와 누가의 기록한 방식이 조금씩 다른 이유는 그들이 기술한 책의 독자가 다른 사람들이엇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마가는 로마인들에게, 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읽히기 위해 적었기 때문에  중요시 하는 관점을 고려하다 보니 세부 내용이 조금씩 달라 지는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지고 구름도 사라져버렸습니다. 오직 같이 산위로 올라온 예수님과 자기들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이 남아 있습니다.

베드로는 내려가기 싫었습니다. 초막 셋을 짓고 그곳에 머물자 합니다. 물론 제자들은 신비의 체험을 했습니다. 위로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산아래의 삶입니다.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삶, 이웃을 위한 삶을 살면 주님과 함께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만들려고 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그런 나라입니다.  산 아래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야 할 책임이 제자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1.         기독교는 신비의 종교입니다.(마태복음 17:1-6)
본문은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을 때 그의 모습이 변화되어 그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이 빛처럼 희어진 사건을 다루고 있다.

1)        산에 가신 목적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산에 가신 목적을 누가는 기도하기 위해서 였다고 했습니다.(눅9:28) 그러나 기도는 어디서나 가능합니다. 그런데 왜 높은 산까지 가셔서 기도하신 것입까? 거기에는 기도 이외에 변형된 모습을 가장 사랑하는 세 제자들에게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의 변형은 기독교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시는 것으로 부활과 재림의 진리에 대한 확고한 증명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도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가 개인에게 적용되는 것은 신비로운 체험을 통해서 입니다.





2)        기도중에 변형되심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다가 변형되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이 만남에서 예수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세상으로 흡수되어 버립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로 변화되신 것입니다. 1 천 5 백여 년 전의 모세와 9 백여 년 전의 엘리야와 현재의 예수께서 자리를 함께 하셨습니다. 그것은 장차 주의 재림의 날에 있을 죽은 자(모세-죽은 자의 대표)와 산 자(엘리야-산자의 대표)의 부활과 변화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과거와 미래가 현재 속에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없습니다. 오직 영원한 시간만이 있을 뿐입니다.

3)        산 위와 산 아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이 '영원'을 체험한 것입니다. 얼마나 황홀하고 좋았던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초막 셋을 짓고 여기서 함께 살자고 했습니다( 눅 9:33). 그러나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튿날 예수의 일행은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눅 9:37). 산 위에 올라가서 하는 기도, 산 위에서 겪은 신비로운 체험, 그것은 산 아래에 있는 불쌍한 인간들을 위한 것이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신비한 종교'이지 '신비의 종교'는 아닙니다. '신비'가 수식어가 되어야지 주격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신비는 그것이 현실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삶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으로 적용되지 않는 한 무가치한 하나의 '신비주의'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2.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마태복음 17:7,8)
변화된 예수님의 모습과 모세와 엘리야의 출현으로 인해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은 구름 속에서 들리는 음성으로 완전히 공포에 빠져 땅에 엎드렸다. 그때 두려워 말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이들이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전의 모든 일들은 다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이 전과 같은 모습으로 계실 뿐이었다.


1)        율법과 예언의 복음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선지자, 즉 예언을 대표한 사람입니다. 모세는 죽어서 승천한 자이며(유1:9), 엘리야는 살아서 승천한 자(왕하2:11) 입니다. 이들이 예수의 변형에 동참한 것입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이 복음과 함께 한 것입니다. 율법은 세례요한 때로 마감되었고(눅11:13), 구약의 모든 약속은 예수의 복음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복음에 의해서 모든 인간은 영생을 얻습니다.(요5:39) 예수의 변형에 하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를 동참케 하신 것은 예수의 복음이 율법과 예언의 완성임을 증거하시기 위한 데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변형된 후에 모세와 엘리야는 곧 사라지고 오직 예수만 남은 것은 바로 이런 진리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세(율법)나 엘리야(예언)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복음)에 의해서만 구원받습니다. 오직 예수로만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길이시며, 진리이시며, 생명이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구주이십니다.

2)        변형이 의미하는 것
예수의 변형과 함께 그 진리에 동참했던 모세와 엘리야는 그들 생전에 예수의 변형과 같은 체험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아 가지고 내려올 때 그 얼굴에 광채가 나고 있었으며(출 34:29-35), 엘리야가 불병거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한 것(왕하 2:11)은 변형되지 아니하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변형된다는 것, 그 것은 신적 변화이며,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여가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신적 현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의도하시는 목적이 있을 때에 나타납니다. 모세, 엘리야, 예수 그리스도는 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없어서는 안 될 목적과 사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변형된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임무의 부여이며, 사람 편에서는 사명의 인수를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변형되셨을 때 모세와 엘리야가 '예루살렘에서의 예수의 죽음'에 대하여 말한 것은 이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눅 9:31).


3.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
1)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5 절)라고 하나님은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증거는 예수께서 요단 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도 하신 말씀입니다( 마 3:17). 하나님은 예수의 공생애 초기와 공생애 말기에 똑같은 증거를 하셨는데 이는 듣는 무리로 하여금 메시아로서의 예수에 대한 신앙을 확고히 갖게 하려는 데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예수께서는 변화 산 사건 이후 약 9 개월 후에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신앙, 그것은 복된 성도의 축복입니다( 시 1:1, 2).

2)        들어야 할 생명의 말씀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5 절)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서 꼭 들어야 할 말씀은 복음이라는 것과 믿음은 곧 순종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말이 있으나 생명을 살리는 말씀은 오직 예수의 복음밖에는 없습니다. 사람이 꼭 들어야할 말씀은 오직 복음뿐이며, 이 복음을 들음으로 믿음이 생기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가 우리의 대속주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가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을 믿어야 합니다.

3)        온 인류가 순종해야 할 그리스도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이 말씀은 비단 제자들에게 뿐 아니라 오고가는 세대의 모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촉구입니다. 인간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믿음은 순종으로 표현됩니다. 성도는 예수께만 순종하는 무리들을 말합니다. 내 뜻을 고집하는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나를 앞세우는 것도 순종이 아닙니다. 순종은 온전히 나를 버리고 예수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순종할 때 우리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4.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마태복음 17:9-13)
변화 산의 사건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바로 약속된 메시야라는 확신을 갖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 여전히 메시야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서기관들의 말이 마음에 걸려 이를 예수께 묻자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이 바로 엘리야였던 것을 암시하셨습니다.

1)        진리는 아무나 이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산상 변화가 있은 그 이튿날, 예수와 세 제자들은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내려오시면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분부하셨습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9 절). 이에 대하여 제자들이 질문하시기를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10 절)라고 했습니다. 산상에서 본 것, 즉 예수의 변형과 엘리야의 등장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이며, 왜 예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제자들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일까요?
진리는 아무나 이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해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이 있는 자에게만 주시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입니다. 비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에게 진리를 말하는 것은 오히려 그에게 거침돌이 되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피차를 해치게 됩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전달하는 것은 인간이 하지만 그것을 이해시키는 것은 성령께서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지 아니한 자는 결코 진리를 이해할 수도, 승복할 수도 없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기 때문입니다(참조, 요 16:13). 들을 귀가 있는 자, 성령이 내주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가 저들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2)        십자가와 부활을 아는 자라야 진리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복음서 가운데 여러 곳에 나타나 있습니다. 문둥병자를 고치신 후에(마 8:1-4), 두 소경을 고치신 후에(마 9:27-31), 귀머거리를 고치신 후에(막 7:36), 각색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후에(막 1:32-4),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후에(막 5:35-43) 예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병을 고침 받는다든가, 병신이 완전케 되었다든가, 귀신들린 자가 완치 되었다든가 하는 데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열 문둥이가 다 고침을 받았으되 예수께 나아와 감사한 것은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눅 17:11-19).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라'(마 16:16)라고 그의 신앙을 고백했을 때에도, 아무에게도 내가 그리스도인 것을 말하지 말라고 주님은 말씀하셨고(마 16:20). 본문에 나타나 있는 산상 변화 후에도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그리고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의 의의를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진리를 이해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며,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계시되었습니다.

5.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1)        진리에 대하여 무지한 세상
산상에서 본 것을 아무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신 주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질문했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10 절). 이 대화 속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산상에서 본대로 예수께서 메시야라고 한다면 어째서 서기관들이 말하는 엘리야가 메시야에 앞서서 선지자로 나타나지 않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접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세상은 진리에 대하여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기다리고 있는 엘리야는 이미 세례 요한으로 와서 엘리야의 사역, 즉 백성들의 죄에 대한 책망과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헤롯 왕과 헤로디아의 불의를 비난한 것은 엘리야가 여호와 신앙을 잃어버린 백성들을 책망하고 아합 왕과 이세벨의 불의를 비난한 것과 같습니다( 왕상 18:20, 21). 그러나 세상은 다시 온 엘리야(세례 요한)도, 또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도 알지 못하였으므로 세례 요한과 같이 고난받을 것을 예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12 절).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진리를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지 아니합니다.

2)        진리는 지식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영성(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랍비들로서 그들은 사헤드린 공의회를 조직하였으며, 유다의 귀족적 지위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엘리야와 메시야의 도래를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해박한 성경 지식이 그것을 아는 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진리를 아는 것은 지식으로가 아니라 영성에 의해서이며, 진리는 아는 것으로 얻하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믿음에 있고 지식에 있지 아니하며, 구원 또한 믿음에 있고 아는 것에 있지 아니합니다.

맺는 말씀
        인간은 누구나 현재의 삶에 안주 하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현재의 안락한 삶, 현재의 풍부한 삶, 매일 습관되어진 삶, 나에게 편한 삶, 때로는 나에게 주어진 예수님의 세제자들이 격었던 신비한 삶 처럼 그곳에 머물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산 아래의 세상이 있다 하십니다. 그 세상에서 성도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삶은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삶, 이웃을 위한 삶을 살면 주님과 함께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만들려고 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그런 나라입니다.  산 아래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야 할 책임이 제자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레미제라블이라는 뮤지컬에서 장발장이 죽기 직전에 부르는 노래의 가사가 있습니다.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려면, 천국에 가려고 하면, 구원을 얻으려고 하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과 같이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변화산의 이야기를 통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과 성령체험의 균형을 이루어야 하고, 산위에서 체험한 영성을 가지고 산 아래 세상을 구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 나 자신만을 위한 믿음은 반쪽짜리 신앙생활이요  주님이 원하시는 거듭난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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