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enu

Sermon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사랑(눅10:25-37)

Admin 2014.04.13 18:05 Views : 663 Recommend:34



http://www.kchurchofchrist.com/pdf/041314.pdf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사랑(눅10:25-37)

        오늘은 사순절기간 중 종려주일 입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21장에서   벳바게에 도착하였을때 제자들에게 마을에 가면 나귀 새끼가 메어 있는 것을 네가 보리니 그것을 끌고 오라 하셨습니다. 누가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가서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하여 나귀 새끼를 데여와 그 위에 겉옷을 덮고 예수께서 타시니  다른 사람은 겉옷을 길에 깔고,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니 온 성이 소동하였습니다. 이 날을 기념하는 주일이 종려 주일입니다.(마태복음 21장 참조)
또 사순절은 3월 5일(수요일)부터 4월 20일까지 6주일을 빼고 나면 40일이 사순절입니다. 40일은 기독교에서 참회의 기간으로 합니다. 40일은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고 시험받으신 것을 기리기 위하여 교회에서 규정한 계절입니다.
다른 때 보다는 자신을 돌아 볼수 기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기간을 지내면서 주님이 부활하신 그 놀라운 사랑을 체험해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다음 주일은 절기적으로 보면 부활 주일로 정하고 교회들이 기뻐합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10장은 종려주일을 맞으며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을 체험하기 위하여 선택하였습니다. 오늘 읽은 누가복음에서 우리는 예수께서는 70인을 선택하여 전도를 보내시고 돌아와 보고를 받으신 후 어떤 율법사가 시험하기 위하여 예수님께 질문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 하는 질문에 대하여 비유를 들어 설명하신 내용입니다.

첫째, 율법사와 예수님(눅 10:25-27)

       오늘 예수님과 한 율법사의 질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사랑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율법사는 뛰어난 종교적 안목을 가지고 영생 획득의 방법을 주님께 물었으나 그 질문의 의도 및 목적이 불순함으로 인해서 자기 모순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올바른 탐구적 방향과 자세는 어떤 것인지 상고함으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율법사의 질문
  율법사는 주님을 시험하고자 질문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전에 주님께 율법의 요지를 묻고 주님의 교훈에 호의적 반응을 보였던 다른 한 율법사와는 그 의도가 달랐습니다(막 12:28-34). 그가 이렇게 종교 최고의 관심사를 주제로 하여 주님을 궁지로 몰고자 함에는 몇 가지 동기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영생을 공공연히 보장하셨기 때문이며( 눅 10:20),
둘째, 그 영생의 열쇠가 바로 예수님 자신 안에 있다고 하셨으며( 눅 5:24 ; 10:22),
셋째, 주님께서 율법사들을 비판하시고 정죄하셨던 까닭입니다 ( 눅 7:29, 30).

따라서 주님께 반감을 품고  그 답변의 여하에 따라 주님을 정죄하는 한편 자신들의 율법주의적인 구원관만이 진리임을 과시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진리를 탐구하고 논의하는 것은 성도의 특권이요 의무이지만, 그것을 단순한 논쟁거리나 혹은 자기 과시를 목적으로 한다면, 우리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을뿐더러 교회 공동체의 질서와 분위기를 파괴하는 것이 됩니다 ( 딤전 6:3-5 ; 딤후 2:14, 23). 독한 시기와 다툼과 자랑을 근저로 한 지식의 발로는 '위로부터 내려 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약 4:15)이라고 했습니다.

  2.  영생에 대한 질문은 인생의 본질적 물음입니다.
  비록 율법사의 의도는 불순한 것이기는 하나 그 질문의 내용은 우리 인생들로서는 가장 중요한 삶의 관심사입니다. 영생의 획득에 관한 이 물음은 율법사 외에도 수 천년간 많은 사람과 다양한 학문들이 여러 각도에서 이 내용으로 질문해 왔으며,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1)  성도의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농부는 밭에, 상인은 돈에, 권력자는 그 지위 유지에 관심을 품고 생활하듯 하나님의 자녀는 늘 영원한 생명과 가치들에 대해 의식을 기울이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골 3:1-4). 주님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는 말씀 역시 영생 문제를 성도의 관심사와 소망으로 삼으라는 의미입니다. 성도가 늘 '땅의 일을 생각'(빌 3:20)만하고 있다면 그 자격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 딤전 6:3-5).

  2)  그것은 그리스도의 관심사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영생을 추구하는 동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영생을 주시고자 하는 관심으로 충만해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참조, 딤전 6:11, 2).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어떤 것보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고 하셨으며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게 된 것을 크게'성령으로 기뻐하사'(눅 10:21)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으며( 10:21), 사마리아 수가성의 한 아낙네가 주님 안에 있는 영생의 샘물을 발견했을 때는 주님께서 너무도 흐뭇하셔서 식사까지 거르신 적도 있었습니다 ( 요 4:10, 11, 27-34). 그러므로 우리가 영생 획득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곧 주님의 가장 큰 관심사에 동참하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으로서의 자존심마저 유보하시고 이 땅에 뛰어들어오신 그리스도의 꿈과 뜻을 이루어 줄 수 있는 것이며, 인생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답하는 방편 중의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3.  자기 모순적인 질문입니다.
  1)  율법의 요구를 외면했습니다.
  주님께서 '네가 어떻게 읽느냐'(26절)고 질문하신 것은, 네가 율법을 어떻게 적용하느냐는 물음인 것입니다. 저들은 율법을 타인에게만 적용시켰을 뿐 자기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았다고 주님께서 지적하신 일이 있습니다 ( 마 23:1-4). 동양의 옛 격언 중에 '소인은 자신의 무지함을 감추기 위해 학문으로 위장하고, 군자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자 학문을 배운다'고 했습니다.

  2)  율법의 성격과 의미에 무지했습니다.
  이 학자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율법을 스스로 이룰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율법은 우리의 모순됨과 무능함을 거울처럼 보여 주므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이끄는 회개의 방편은 될지언정( 갈 3:10, 11, 22-24). 결코 영생 획득의 수단은 될 수가 없습니다. 이 율법사는 자기 앞에 계신 분이 바로 율법의 완성자요, 그 의미가 되시는 분임을 모르는 영적 무지자입니다.

둘째, 우리의 이웃이 누구일까?(28-35)

  율법사는 처음부터 율법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라는 명령에 대하여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대답하신 말씀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1.  네가 도와야 할 이웃

  먼저 주님께서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것은 내가 도와 주어야 할 이웃에 대하여서입니다. 이것은 사마리아인의 입장을 통하여 주시는 교훈입니다.

  1)  강도 만난 사람
  주님께서는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 즉 세리, 창녀 등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는 자들을 즐겨 찾으시고 그들의 이웃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또한 정상적인 육체를 갖지 못함으로써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 즉 나병 환자, 소경, 앉은뱅이, 귀머거리 등의 이웃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의 이웃이 되어 은혜를 베푸셨던 사람들이 바로 본문에 나오는 강도 만난 사람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에만 있지 아니합니다.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이러한 자들에게 괌심을 가져야 합니다. 성도들의 이웃은 세상에서 대접받지 못하고 소외되어 외롭게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2)  원수인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사마리아인의 입장에서 보면 유대인은 원수입니다. 사마리아인 스스로가 유대인을 원수로 삼은 것이 아니라 앗수르롤부터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당한 후 그들의 이주 정책에 의해 사마리아 지역이 혼합 민족이 되면서부터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을 원수와 같이 여긴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개처럼 여겼습니다. 따라서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을 때 사마리아인은 제사장이나 레위인보다도 더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그 자리를 지나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은 그렇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외면한 그 사람을 치료해 주고 주막에까지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주님께서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바로 원수에 대한 사랑입니다. 원수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원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수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형제입니다. 친구입니다. 사랑과 긍휼을 베풀어 주어야 할 이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잠언 기자의 말( 잠 12:21)을 인용하여 사도 바울도 말하였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롬 12:20).

  2.  도움 받을 사람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1)  생명을 귀히 여기는 자
  사마리아인은 생명을 귀히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이 도와 주어야 할 사람의 국적이나 사회적인 지위 재산 따위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구해 줌으로써 얼마나 나에게 이익이 돌아오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단 하나 그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생명을 귀히 여기는 사람만이 참된 이웃이 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만일 세상 사람들에게 참된 이웃이 되기를 바란다면 먼저 한 사람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긍휼히 여기는 자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사마리아인은 또한 불쌍히 여길 자를 마땅히 불쌍히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남을 불쌍하게 여겨 줄줄 아는 사람은 사랑이 많은 사람입니다. 사마리아인은 마음에 여유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음이 풍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강도 만난 사람을 발견했을 때 그냥 지나치지를 않았습니다.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된 근본 원인이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긍휼과 연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불쌍히 여겨 주십니다. 그 불쌍하게 여겨 주시는 마음에서 용서가 나오고 인애가 나오는 것입니다.

  3)  자기를 희생하는 자
  사마리아인은 자기를 희생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자기를 희생하고 이웃을 도울 수 있는 자세는 갖추어져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을 때 자기의 위험을 돌보지 아니하고 그에게 다가 갔으며 아낌없이 포도주와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리고 나귀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가 부비까지 주면서 치료하여 주었습니다. 이처럼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사람, 이처럼 남을 아끼고 남의 목숨을 나의 목숨으로 여길 줄 아는 사람만이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이웃, 강도 만난 사람에게 있어서의 사마리아인은 누구일까요? 그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선한 이웃이 되십니다.

셋째 참된 이웃사랑은 실천에 있다(36,37)

본문은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의 결론 부분입니다. 이 비유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참된 이웃 사랑은 실천하는 데 있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강도 만난 자의 참된 이웃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속에 나타나 있는 예수의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1.  선한 사마리아인의 실천적 사랑

  1)  편견을 극복한 사랑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개'로 취급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개들처럼 히브리 민족으로서의 혈통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만큼 사마리아 사람들도 유대인들에 대하여 적대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증거는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를 배척한 일로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다만 예루살렘을 향해 가신다는 이유만으로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서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배척했으며( 눅 9:51-53), 수가성 우물가에서는 사마리아 여인으로부터 냉대를 받으시기도 했습니다 ( 요 4:9).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은 이런 종족적 편견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이 유대인이냐 아니냐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가 거의 죽어가고 있고 이러한 사람은 급히 구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만을 한 것입니다. 모든 편견은 사랑의 능력을 제한합니다. 이 편견을 극복함으로써 사랑은 자기 능력을 확대해 갈 수가 있습니다.

  2)  희생을 지불한 사랑
  그의 사랑은 기꺼이 희생을 지불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시간과 돈을 강도 만난 자를 위하여 아낌없이 썼습니다. 그는 사람을 도와주되 형식적으로 도와 준 것이 아니라 그의 성의를 다하여 도와주었습니다. 그는 그를 주막에 갖다 맡기고 완전히 회복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가 행한 일에 대하여 보답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저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도와 준 것만으로 기쁘게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보답을 기대하지 않고 순수한 인간애로 희생을 지불한 사랑, 그것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이었습니다.

  3)  자신이 직접 실천한 사랑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 강도 만난 자를 보고서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들은 모두 백성들을 대표하여 성전에서 하나님께 봉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이 직접 그 사람의 구호에 임했습니다. 지나가는 다른 사람을 시켜 도와 준 것이 아니라 자기가 몸소 봉사한 것입니다. 그는 실제로 사랑을 실천한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한 자만이 참된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36. 37절).

  2.  예수 그리스도의 실천적 사랑

  1)  죄인들을 위한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 강도 만난 사람과 같이 사탄의 공격을 받아 거의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인간들을 구하시려 주님은 하늘의 보좌를 버리셨습니다. 화육의 신비를 통하여 사랑과 겸비와 고난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세리와 창기의 친구가 되고 문둥이와 귀신들린 자의 치료자가 되셨습니다. 선한 사람과 의인을 사랑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죄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확증하기 위하여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2)  섬기는 사랑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섬기는 사랑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기신 것처럼( 요 13:4-11) 주님은 섬기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공생애 사역 기간에 주님은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죄인들을 섬기셨습니다. 말씀을 가르치심으로써 병자와 불구자들을 섬기셨습니다. 모든 병든 자들을 치료해 주심으로써 병자와 불구자들을 섬기셨습니다. 주님은 사랑은 인간들이 살고 있는 거리에서, 집에서, 산에서, 들에서, 바닷가에서 현실적으로 베풀어졌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37절).

  3)  생명을 희생한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생명을 버린 사랑입니다. 시간이나 돈을 희생한 사랑이 아니라 주님의 목숨 자체를 희생하신 사랑입니다. 주님은 하늘의 보좌를 희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본체로서의 영광을 희생하셨습니다 ( 빌 2:6-8). 그리고 주님은 그 생명 자체를 희생하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세력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늘에서부터 땅에 이르기까지 실천하는 사랑이었으며 행동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이 실천하는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은 모든 죽어가는 사랑이었습니다. 이 실천하는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은 모든 죽어가는 죄인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 계신 진정한 우리의 선한 이웃입니다.




Up